오사카 환상선 표지
5.0 ★★★★★
웹툰

오사카 환상선

상태
감상중
기록
2026.08.31

오사카 환상선



  살면서 관심을 가지거나 제대로 알아본 적 없는 주제.

창작물의 법칙으로 계층과 역사를 녹여낸 작품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알 길이 있었을까?


가장 좋았던 독백 부분.

[52화 中]

「"매번 학교에서 달려서 돌아오면 창문 너머로 더듬더듬 책을 읽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게 좋아서... 매일 조금씩 확신이 생기는 그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괜히 한참을 들어가지 않고 앞에 앉아서 듣고 있곤 했어요.

읽을 줄 몰랐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사상도, 신념도, 역사도.

배우고, 의심하고, 답을 구하고.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이 쪽을 선택했다가, 다시 저쪽으로 갔다가 또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하고.

그러다 다시 또 무언가를 믿기로 결심하고.

그런 식으로 점점 자라겠죠. 세상을 배워가겠죠.

자라나는 것. 배워가는 것. 어른이 되는 것.

그런 게... 그런 게 훨씬...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해."」


[45화 中]

「"가끔 꿈을 꿔요. 친구들도 선생님도 전부 배를 타러 가서 교실이 텅 비어버리고 나만 남아 있는 꿈.

저라고 선생님을 울리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렇게라도 그 녀석 입을 막지 않으면 꿈이 현실이 될까 봐 무서워요."

(중략)

"네가 남한이라는 나라를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어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서 갑자기 고향을 뺏을 순 없는 거야.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없으면 집단은 힘을 잃고 마는걸."

"...그래도 전 총괄 시간이 싫어요.

자아비판도. 매일 초상화에 대고 고개 숙여야 하는 것도.

하지만 사실은, 저도 남한엔 가본 적도 없으니까.

공화국이 싫어서 떼를 쓰고 있는 거나 다름없단 걸 저도 알아요.

하지만 하나 둘 씩 떠날 때마다 너무 불안해져요.

이런 식으로 전부 뿔뿔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해서...

아저씨는요? 아저씬 어떻게 생각해요? 아저씨가 생각하는 고향은 어느 쪽이에요?"

"국적은 차표 같은 거야.

삿포로에 가고 싶으면 삿포로 행 열차표를 사고 큐슈에 가고 싶으면 큐슈 행 열차표를 사지. 

고향을 고르는 일도 똑같아. 어딜 왕래하고 싶은지에 따라 각자 정하면 그만이야."

"...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가볍잖아요."

"가벼우면 안 돼?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에든 머물 수 있는 건 고향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우리들의 특권이야."」


백산과 준코가 1:1로 싸우는 56화의 대화도 정말 좋았다.

상징에 대한 이야기도 굉장히 좋았는데 그건 어느 파트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

국가라는 건 사실 상징에 불과하지만, 그런 상징이 왜 필요한지, 사람들은 왜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말이었는데.


재일한국인이라는 건 나한테는 굉장히 생소한 소재였다.

일단 우리 집안은 너무 산골짜기라 625의 여파도 없던 시골 동네 출신이고 주변사람들의 틀도 나와 크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서 총련이라던가, 이 시대 재일한국인을 남한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던가 하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역사책에 이런 내용이 있던가? 북한이 국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기도.

(원래 제가 근대파트는 좀 약함...) 

전 세계가 종전 이후의 격변을 겪고 있었던 시대인데, 새삼스럽게 그 격변의 정도가 계층에 따라 편차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국가와 그에 속한 국민, 즉 우리가 살아온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 국가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국가가 받아주지 않은 사람들은? 그 경계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던 걸까. 국가와 민족이라는 건 상징과 허울이면서도 시스템이라서 마음대로 속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다. 일본에 산다고 일본인 취급을 해 주는 것도 아니야,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던들 고향은 받아주지도 않지.

등장하는 주요 세력인 조선학교의 남관과 북관, 부락민들은 전부 다 다른 길을 추구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여 필사적으로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찾은 길이라는 점은 같다.

고향이란 것이 뭐길래 사람들은 그렇게 돌아가고자 하는 것일까?

동시에,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땅을 고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위에서 못 찾은 상징에 대한 설명이 여기에 답을 줬던 것 같은데... 못 찾았다. 다음에 정주행하게 되면 또 적어야지.

사람은 누구나 발 붙일 곳을 그리워하니까...


남관 학생과 북관 학생의 대립도 생소하면서도 정말 많은 생각을 주는 대목이었다.

남한과 북한을 선택한 이유들이 지금의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못 한 것들이어서...

백산이라는 인물이 정말 절묘하고 좋았다. 다만 무서웠음. 설득돼서...

백산과 준코의 대립지점은 분명하다. 국가를 위한 민족인지 민족을 위한 체제인지.

지금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나도 그렇듯 상식적으로 민족을 위한 체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듯하다.

다만, 이 시점의 조선사람들은 이미 국가를 잃어본 적 있는 사람들. 일제에 의해서 조선이 식민지화되고, 외세에 의해서 나라가 갈가리 찢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라가 힘을 잃으면 사람들을 묶는 힘도 약해지고, 뿔뿔이 흩어지겠지...

작품 속 현재 시점처럼.

그래서 북관의 주장도 납득이 되었다. 

국가를 위한 혁명 전사냐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냐...

이걸 대사로 풀어낸 이 작가님은 얼마나...? 통찰이 깊으신 것인지...


작화도 정말 아름다웠다. 작가님이 드로잉을 정말 잘 하심.

이렇게 단순한...?(전혀 단순하지 않은데 요즘의 화려한 작화 플로우와 대비되는 단어를 생각해낼 수 없음...)

작화로 이만한 섬세함을 이끌어내는 이 스킬이... 그냥 사람을 압도한다 와진짜...

특히 먹칠과 붉은색 기반의 모노톤 기법이 이 작품 작화의 가장 큰 특색인데,

색 대비를 활용한 레이아웃부터 스크롤을 활요한 긴 연출.(2화? 3화에서 플래시를 바탕으로 폐기물들을 주우러 뛰어다니는 조선 사람들이 너무.... 아름다웠음)

먹칠을 통한 그림자 묘사와 다양한 생김새의 청년과 중년들.

등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모든 사람들의 생김새가 정말 달라서, 특히 야쿠자 파트에서 야쿠자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기분에 전율이 돋았다. 연출이 드라마틱하다기보다는 그 사람들 자체가 생생하고 어디엔가 있을 모습이어서.(물론 연출도 아름다움)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한번에 정주행한 경험은 너무 오랜만이다.

요즘은 웹툰판이 커진 지 오래라 원작 따로, 각색콘티 따로, 작화 따로.

또 작화에서 스튜디오 따로, 선화작가 따로, 채색작가나 보정도 또 따로.

이게 디폴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상업작품이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 있다면 이렇게 스토리 설계자와 연출, 작화 설계자가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작품만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일체감일 것이다.

일체감..,

상업 작품에서는 한 작가가 각색부터 작화까지 다 하는 경우 또는 각색작가와 작화작가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경우가 아니면 어디에선가 꼭 나사가 덜 조여진 듯 아쉬운 구석이 있다.(당사자성)

그런 사람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또 작가들도 워낙 미친사람 많아서 팀 활동도 뭐...

그럼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희귀하기에 영원히 재미있는 한 아이피를 가지고 무한 생산과 소비를 반복하는 것이겠지. 나도 이렇게 돌아가는 세계로 겨우 벌어먹고 살지만 가끔 나는 창작을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걱정할 때가 있다.

이런 걱정조차 사실 나약하고 배부른 상태에서 내뱉는 잠꼬대같은 말이라는 사실을 가끔 이렇게 한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 조사하고 재구성하는 작품을 볼 때마다 느낀다. 

그러니까 이런 걱정 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책을 읽고 뉴스를 보고 기사를 읽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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